삼국지연의며 그에 바탕한 코에이의 게임등으로 잘알려진 제갈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을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삼국지 12에서의 제갈량의 이미지.
제갈량, 자는 공명. 사후 충무후로 불린다.
삼국연의로 인해 불멸의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사실 그 이전부터 명재상이자 충의의 인물로 유명한 이 사람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들 알테니.
참고로 이순신 장군이 존경했던 인물이기도 하니, 사후 자신도 '충무'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것을 알면 이순신 장군은 아마 흐뭇해 할 것이다.

제갈량의 업적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수많은 이야기꺼리를 남긴 것은 바로 6차례에 걸린 위나라 침공. 즉, 북벌이다.

일단 군사력 강약을 따질때 가장 기본이 되는 촉과 위의 국력의 차이를 보자면,
인구수(호수)며 농지 면적, 그에 기반한 세수등 여러 기준이 있으며 하도 옛일이라 정확한 비율을 말할순 없으나.(사실 현대 국가의 국력도 구체적으로 누가 몇배쎄고 약하다 말하기 힘들다)

이를 논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당시의 위가 촉보다 5배에서 10배가량 강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이런 강대한 적을 상대로 지형에 기대서 방어전을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산길을 넘고 간도를 지나 북벌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북벌은 실패하고 이는 전략적인 실수로 보여진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은 결코 승산이 없는 싸움이 아니었고, 실제로 촉군은 위군을 상대로 전투의 승률이 제법 높았으며 오장원같은 전략적 요충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구글어쓰로 살펴본 오장원 주변 지역도.
물론 현재의 지형과 삼국시대의 지형을 동일하게 보긴 힘들지만
촉이 한때 위나라의 영토를 끊어먹으며 장안을 노리는 요충지까지 진출해서 머물렀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국력이 5배 이상 앞선 적을 상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유중 하나는. 큰 축은. 
제갈량이 동시대 타 고위 관료와 차별화되는 면모었다. 

바로 제갈량은 기술 개량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테크노크라트라는 점이다.
이것은 삼국지 연의에서도 신비한 자동 수레 목우 유마며 유언에 남긴 연노등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명에서 제작한 제갈노

중국에서 노-석궁-은 기원전 5세기때부터 보병의 병기로 널리 쓰였고 총기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주력 원거리 병기로 쓰였다.
노에 기계적 장치를 더해서 연속발사를 가능하게 하거나 한번에 여러대를 쏠수 있게한 연노 자체도 기록 자체는 꽤나 오래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전국시대 [묵자]에 연노차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전한시대 몇몇 형태의 연노가 존재했다.
제갈량은 그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10대의 화살을 한번에or연속적으로 발사할수 잇는 노를 만들었으며 이를 장비한 실전부대를 편성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 게임에 등장하는 원융노병이다.
연노를 개량한 제갈량의 의도는 강력한 위나라의 기병을 견제하기 위함일 것이다.
(다만 '한번에 or 연속으로' 부분에서 알수 있듯이 제갈량이 만든 연노의 구체적인 형태나 구조는 기록이 없어 미지수이다.)

명나라 시대에는 이에 모티브를 얻어 제갈노라는 연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제갈노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온 명나라 군사도 보유했으며
'사정거리가 낮아서 병기로서 가치는 낮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제갈노는 그냥 이름만 제갈노일뿐, 실제로 제갈량이 개량한 연노는 보병용 휴대 병기가 아니라 상자노와 같은 대형 설치형 병기라는 주장도 있다.

창.
지금 창이란 곧 찌르는 병기의 대명사이고, 삼국지 연의 소설내에서 '모' '피'등도 장팔사모같은 고유명사가 아닌 경우는 '창'이라 뭉뜽그려 번역하곤 한다.
그러나 창은 오히려 후발주자!
그 창을 만들고 창이 찌르는 장병기의 대명사가 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제갈량이다!
여기서도 제갈량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천재'가 아니라 '기존 기술을 접목하고 개량하는 수완가'라는 것을 엿볼수 있다.
본래 창이라는 단어 자체는 삼국 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찌르는 장병기는 역사보다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형태로 규격화하고 개량한후 창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실전 부대에 지급하고 훈련시킨 것은 제갈량이고 후대에 한국, 일본등 한자권에서 찌르는 장병기의 대명사가 '창'이 된 것 역시 제갈량의 공이다.

갑옷의 경우는 창, 연노처럼 그 명칭까지 좌우할 정도의 임펙트는 없으나,
쇠미늘을 끈으로 엮어낸 형태의 갑옷, 미늘갑옷을 만든 것이 제갈량이란 소리가 있다.
이 갑옷은 창과 마찬가지로 진등 후대로 계승하며 고구려등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실 앞의 연노, 창도 그렇지만 꼭 제갈량 본인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휘하 기술자가 만든 것인지 어쩌면 원래 있던 것을 촉군이 잘써서 후세에 '제갈량이 만든걸거야'소리가 붙은 건지는 확실히 할수 없다.
다만 제갈량이 여러모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것은 사실이라 제갈량이 했다 표현한다.
사실은 분명 하나겠지만 세월이 흘러 역사가 되면 하나가 아니게 되는 것이니 다른 안에 열어둘 필요가 있다.-

군량을 실어나르는 수레인 목우유마 역시 제갈량이 만든or개량한 물건으로.
촉한의 지옥같은 보급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군량미 실어나르다 2계급 특진할 기세.jpg
 
목우유마는 물론 실제로 무인으로 움직이는 신비한 자동 수레였을리는 없고
촉한의 험한 길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수레로 엄연히 정사에 기록되어있다.
다만 그 구체적인 형태나 구조야 설계도가 남아있지 않으니 알수 없는데,
크게 4륜거 설과 1륜거에 (4개의)지지대가 달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마사가 판단하기에 4륜거는 인력 소모는 적겠지만 지반이 고르지 않으면 사용이 어려우니 제갈량이 목우유마를 만든 이유와 연관지어 생각해본다면
1륜거 쪽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 1륜거가 어떻게 생겼을지 현대에서 재현한 모형을 한번 볼짝시면~

허이!
 



.....머리까지야 뭐 무게 중심 어쩌고 그런다 쳐도.

......뿔까지 조각해 넣었냐?!
전쟁 통에 여유로운데!

그외에 칼2천 자루를 만들게 했는게 예리해서 신도라 불렸다등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팔진법도 사실은 대기병용 보병 방진이란 것도 후대에 밝혀졌다.
유독 제갈량에 관해 이런 기록이 많았다는건 제갈량이 단순히 장비면에서만 신경을 쓴게 아니라 장병들의 훈련에도 직접 관여하고 머리를 짜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갈량은 촉의 약한 국력을 안정된 내치, 기술개발, 훈련법 개량등 다른 요소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메꾸려 애를 쓴 것이다. 

제갈량의 북벌들을 살펴보면 전투면에서는 승률이 높았다.
사마의등이 제갈량에 적극적으로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싸움 위주로 갔던 것은.
물론 전략적으로 지키면 제갈량이 불리하다는 원칙을 활용한 대전략의 탓이나,
맞서서 싸우면 또 패배할 위험이 높았기도 하다.
촉과 위의 국력 차이로 볼때 제갈량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물론 북벌은 실패한 전쟁이고, 그 실패원인은 제갈량의 잘못에 있다기 보다 위가 잘했기 때문이다.
앞서말한 대전략은 물론, 사마의, 조진등이 전략 전술적인 면에서 제갈량을 앞섰기 때문이다.
삼국연의에선 제갈량에게 신나게 발려서 사마의를 불러내는 역할인 조진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장수로서 제갈량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1차 북벌 저지, 학소의 진창성 배치등 삼국 연의내에서 사마의가 세운 공의 상당수는 실제론 조진의 것이다.)
사마의 역시 제갈량의 신중함을 역이용해 병법상 위험한 강행군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제갈량이 내정 실력만큼의 군사실력은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만.
역사상에 보면 정치면에서는 과감한 일류인데 군사면에선 아주 평범한 역량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이 종종 있다.
(카이사르의 양자로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등)
그런 지도자들도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란 법은 없으니 바로 모자라는 군사적 재능을 절충해줄 뛰어난 보좌관이 있었다.
제갈량의 경우 조진, 사마의급의 인재를 갖고 있지 못했다.
한편 내정 일일히 주관하면서 군사적인 일까지 익히는게 어려울 것이란건 상식적으로 알수 있다.
하지만 정공법을 중시하다보니 인재가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마사는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 정말로 위연이 장안을 칠 자신이 있어서 했다기보다 정공법을 탈피해보자는 수준의 발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건 어디까지나 여담인데, 이런 지도자들은 체구가 왜소하거나 건강이 나쁜, 즉 육체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치까지면 몰라도 실제로 창칼이 오가는 전장에선 육체적인 자신이 배여있는 경우가 아니면 모험을 꺼리게 되고 병법등 기존 상식에 많이 의존하게 되기 쉬울 것이다. 
제갈량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은 적고 신빙성도 의심되긴 하나 대체로 신선같다, 하얗다 같이 쌈 못할거 같은 평이 많으니 천상 문사 체질이었던 듯 싶다.)

또한 역사상에는 스스로 내정을 하면서 전략적으로 우위에 서있는 적을 자기 명운을 걸고 맞서 쳐부수고 그 진영을 정복한 군웅이 여럿 있다.
사실 그 중 하나가 바로 조조이다.
제갈량은 나관중이 그린 것처럼 도술을 쓰는 존재도
타임머신 타고 나타난 듯한 만능 영웅도 아니고,
지혜롭고 헌신적이나 때론 타인의 역량에 밀리기도 하는.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말을 늘이고자하면 끝이 없으니 이쯤에서 정리하자-
제갈량은 인적 자원의 열세를 장비 개량과 신식 훈련으로 커버하려 했으며,
좋은 방어막이자 북벌의 장애물인 촉의 산지를 목우유마로 커버하려 했다.
그 결과, 위에 상당한 위협을 가했으나 북벌은 결국 실패했고
촉은 제갈량 사후 한세대 만에 망한다.

.....물론 그렇다.
북벌은 엄연히 실패한 전쟁이었고, 촉은 위에게 패망한다.
사실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애시당초 당고의 화니 황건난이니  십상시의 난이니 하는 사태는 한에서 일어난 일이고,
민중 봉기인 황건적을 정규군으로 제압하지 못하고 주목제라는 변칙을 시도해 의용병, 향병을 끌어들어서야 막은 시점에서 한나라의 권력 구조는 붕괴.
옛날식으로 말해 천명이 끝난 것이라 볼수 있다.
나아가 동탁이 수도를 불태우고 황제를 갈아치웠을때.
한나라의 생명은 끝난 것이겠지.
위는 한의 천하를 뺐은게 아니라 한이 잃어버린 천하를 한의 권위를 이용해 손에 넣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시대착오적인 명분에 백성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는 현대적 비판 역시 일리가 있으며
그런 시각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 또한 역사의 진보일 것이다.
(사실 유비의 행보를 보면 한실부흥 또한 권력을 향한 명분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약 이천년전에
-역량있는 한사람의 남자가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준 군주에 보답하기 위해 강대한 적에 맞서 죽는 순간까지 온갖 궁리를 짜냈던 일이 있었다-
는 역사 그 자체를 음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살았던 사람, 모두 죽어 뼛조각 하나 남은 사람이 드물거늘.
 
Posted by 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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