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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설경(雪景)

죽은 자들의 말이 전해졌다

뇌성마비로 이십 년을 버틴 청년과

오래 중풍을 앓던 초로의 사내가

무거운 허공을 헤엄쳐

저기서 여기로 건너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들이

내 귀에 어두운 꽃씨를 심는다

귀가 간지럽다 나 죽은 뒤

내 귀에도 꽃 피어날까

꽃 핀 봄날

가루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가루눈은 곧 폭설이 되었다

나는 산 자 하나를 기다렸다

폭설이 어둠의 모서리를 깍아내리는 거리

산 자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축축한 눈을 한 짐씩 이고 사람들은 귀가를 서두른다

때늦은 추위에 웅크리고 가는 저들이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들 사이로 십 년전에 죽은 젊은 사촌형이

가벼이 지나간다 그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갑작스런 간질 발작으로 그는 일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흰자위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눈속을

떠다닌다

산 자와 만나 술을 마신다

입술이 새파래진 나는 죽은 자 쪽에 가깝다

술집 바깥으로 삽십년 만에 눈은 무섭게 퍼붓고

숯불로 환한 술집에서

아직 핏물이 덜 빠진 생살들 시커멓게 익어간다

다시 보니 붉고 푸른 시반 피워내며

나와 마주란 자는

사촌형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입 안에서 죽은 자들이 씹힌다

그들이 남긴 고기가 질기다

너무 쉽게 산 자들의 도시는 마비된다

발을 동동 구르며 산 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무도 무서운 설경을 예감하지 못했다

산 자는 설경 안에 나를 버린다

하얗게 형체를 잃어버린 거리에서 자꾸

죽은 자들이 나를 통과해간다 서서히

내 귀에선 어두운 꽃씨들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인 김근의 시세계엔 많은 것이 부재한다.
정치의식이나 현대물질문명에 대한 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정적 미학이나 동양적 가치관도 없다.

그런 온갖 부재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환상적이며 음침한 이미지들이다.
눈알 빠진 해골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며, 시체들이 눈밭 위를 걷고, 담벼락 안에 사람을 잡아가는 남자가 살며, 아이들은 서로 잡아먹느라 피칠갑이 되어 있고, 술집조차 술을 판다고 내세우며 사실은 눈알을 사고 팔며, 성기를 뽑아 촛불을 만들며, 과거의 나가 미래의 나를 범해서 또 다른 나를 낳는 세계다.
다른 가치를 배제한 자리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이 어둠의 환상들.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그 자체로도 미학을 가지고 있다.

그런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무서운 설경’이다.
많은 시들에서 서정의 극치로 등장했던 설경이 김근의 시에서는 ‘무서운’ 것이 된다.
새하얀 눈밭은 ‘하얗게 형체를 잃어버린 것’이 되며 그 위를 걷는 자들중 하얀 피부에 푸른 시반을 띈 망자들이 섞여가는 가운데 ‘나’의 귀에선 망자들이 심고간 ‘어두운 꽃씨’가 발아한다.
그것은 담담하면서도 오싹하고 한편 아름다운 정경이다.
스티븐 킹의 -도로를 위해 한잔-이 연상될 정도로 뛰어난 호러 이미지 아닌가!

뭐 이것도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일수도 있겠지~


Posted by 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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