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택도- 노안(擼侒)

잡담 2007. 10. 18. 15:25
주영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때, 이미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난후 대여점에 들려 만화책 두세권 빌려보는 것을 각박한 고3 생활의 자그만 즐거움으로 삼는 그였지만.

이번만은 ‘책을 빨리 고를걸’하는 후회를 금할수 없었다.

버스정류장이라고 해도 가로등이 좀 떨어진 위치인지라 희끄무레한 막대기가 어둠속에 떠있는 듯이 보이는 상황이고 외진 도로이기에 지나는 차마저 없다.

막 빌린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상황이면 거기 집중이라도 하련만.

“연말마다 보도블록 엎을거면 버스 정류장에 불이라도 하나 달아주지 말이야.......”

두려움을 떨쳐보려 혼잣말을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거슬릴만큼 높고 새되었다.

사실 주영은 밤길을 두려워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어둠이 정말로 그냥 어둠일까-하는 의혹이 그의 등골을 타고 흐른다.

최근 시내의 학교들에는 괴담이 돌고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 갇혀사는 고3들 사이에서 괴담은 그나마 몇안되는 자극이지만 이번 것은 자극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괴’하긴 하지만 ‘담’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영이 다니는 학교에서 최근 한달간 행방불명된 학생은 3명,

셋이 한꺼번에 없어진 것도 아니고 약 열흘 간격으로 한명씩 꾸준히 행방불명자가 나왔다.
이것은 시내의 다른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귀가하던 모습.

그 후로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거리에서든 두 번 다시 보이지 않는다.

목격담뿐 아니라 소지품 하나, 인터넷 접속 한건 발견되지 않았다.

한명도 아니고 10명에 가까운 아이가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진다- 단순 가출로는 있을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학교안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을 노리는 존재’에 대한 괴담들이 흘러넘치는 것은 당연했다.

1교시 시작 때까지 빈자리가 있을땐 반 전체가 불안에 휩싸인다.

이 도시 내의 모든 고등학교가 이런 실정이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주영의 가슴은 더욱 섬뜩한 마음이 가득찼다.

다른 고등학교들은 이미 일주일도 전에 야간자율학습을 잠정적으로 중단했고 오직 주영의 학교만이 밤 10시 지나서야 학생들을 해방한다.

만약 밤늦게 귀가하는 고등학생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범죄자, 귀신, 괴물이 있다면.

지금 자신이야말로 희생자 후보 일순위가 아닌가?!




그때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온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항상 반가웠지만 오늘만큼 절실했던 적은 처음이리라.

그러나 정작 손잡이를 잡고 버스안에 오른발을 올리는 순간. 그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이 시간의 버스는 사람이 열명도 안되기 마련인데 오늘은 좌석이 가득차있다.

게다가 서로 수다를 떠는 사람도, 하다못해 핸드폰 통화를 하는 사람도 없이 침묵에 잠겨있는 버스.

주영의 머리속에 괴담 하나가 떠올랐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학생을 노리는 존재로 학생들의 입에 오르는 것중엔 ‘저승으로 가는 유령버스’ 또한 있었던 것이다.

시시한 도시괴담이 지금은 그의 등골을 얼어붙게 한다.

그렇게 멈춘 주영을 내려다보며 버스 기사가 퉁명스레 한마디 뱉는다.

"뭐해요? 빨리 안타고.“

그 말투에 섞인 짜증과 불만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주영을 안심케 하고 버스에 오르게 만들었다.

주영은 출구 앞에 자리잡고 버스안을 둘러봤다.

서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까 입구에서 흘끗 본대로 자리는 거의 다 차있었다.

맨 뒷자리의 중앙 딱 한자리는 비어있었지만 오늘은 거기까지 가기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왜 이런 생각이 들지.’

어쩌면 한결 같이 입을 다물고 표정을 굳힌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승객들 사이를 지나가기가 기분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불길한 느낌을 머리에서 좇기위해 만화책을 펼쳤다.

오늘은 딱히 보고 싶어 빌렸다기보다 뭐라도 하나 들고가려는 심정으로 집은 작품이긴 했지만 그래도 만화에 집중하면 잡생각은 안들겠지.

그때 다시 기사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외쳤다.

“지금 차가 흔들리니 앉지그래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차가 덜컹-소릴내며 흔들린다.

“한 다섯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요?”

“아, 자리 있으니 앉아가요. 그러다 다치면 제 과실이라고 뭐라 한단 말입니다.”

‘것 참. 오늘따라 이래라저래라.’

주영은 뒷 좌석으로 걸었다.

그러나 한발 한발 걸어갈수록 무의식이 경고를 울리기 시작했다.

주영이 정작 빈좌석 앞에선 멈춰 좌석을 꼼꼼히 살펴보게 만든 것도 그 경고였다.

맨 뒷자리 좌석 중앙에 붉은 볼펜으로 그은 듯한 선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 선은 굶주린 짐승의 숨소리와 썩은 고기 비린내를 내뱉는 커다란 구멍으로 화했다.

그것이 입이라면 사방에 달린 수백개의 송곳은 이빨이고 요동치는 붉은 뱀 같은 것은 혀이리라.

“이럴수가!”

비명지르며 뒤로 물러서던 주영은 단단한 무언가에 부딫쳤다.

뒤를 돌아본 그는 재차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승객 모두가 일어나 자신의 뒤에서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수십개의 눈들이 인형의 눈처럼 초점도 동공도 고정되어있는 것임을 알아챘을때, 이미 주영의 몸은 수십개의 손에 붙들려 들어올려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족쇄 마냥 사지를 옥죄는 팔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절규할 뿐이었다.

주영은 마치 락콘서트에서 파도타기처럼 운반되어 수백개의 송곳이 기다리는 구멍으로 던져넣어졌다.

비명은 뼈가 갈려 부서지는 소리에 삼켜지고 버스는 밤길을 달린다.

/새로 기획하는 장편 백택도의 일부.
백택도는 고대의 요괴도감으로 페이지가 세계각지에 흩어져 각각 식인 요괴화 되어 사람을 잡아먹고 있으며,
주인공과 여주인공이 그 페이지를 모으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이야기지.

일단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도입부-주인공일행이 괴물을 잡는 본편의 구도를 반복할 생각이다.
여기 올린 것은 두번째로 등장하는 괴물의 도입부.
Posted by 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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